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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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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지미에시 3세는 폴란드 고공 시대의 왕으로,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는 외교를 통해 보헤미아, 튜턴 기사단 등과 타협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헝가리와 동맹을 맺어 국제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또한, 사법 시스템 개혁, 크라쿠프 대학교 설립 등 내치에도 힘썼으며, 유대인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아들이 없어 조카인 헝가리의 루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1370년 사망 이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카지미에시 3세는 '농민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폴란드 역사에서 '위대한' 칭호를 받은 유일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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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지미에시의 무덤 석상, 바벨
바벨에 있는 카지미에시의 무덤 석상
칭호폴란드 국왕
재위 기간1333년 – 1370년
대관식1333년 4월 25일
선임자브와디스와프 1세
후임자러요시 1세
칭호 1루테니아의 왕
재위 기간 11340년 – 1370년
선임자 1갈리치아의 유리 2세
후임자 1러요시 1세
배우자알도나 오나 게디미나이테
헤센의 아델하이트
크리스티나 로키차나 (귀천상혼)
야드비가 자간스카
자녀엘주비에타, 포메른 공작 부인
안나, 칠리 백작 부인
가문피아스트
왕조피아스트 왕조
아버지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테크
어머니야드비가 볼레스와브브나
출생일1310년 4월 30일
출생지브제시치 쿠야프스키 공국, 코발
사망일1370년 11월 5일
사망지크라쿠프, 폴란드
매장지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서명

2. 생애 및 업적

카지미에시 3세는 고공 시대의 폴란드를 통일해 피아스트 왕조의 중흥기를 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로,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과 내정 개혁으로 폴란드를 강대국으로 발전시켰으며, "카지미에시 대왕" 또는 "농민왕"으로 불린다.

그는 국가 정책에서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 버금가는 천재성을 보여주었는데, 국제정치 문제에서 대단히 신중하고 능란하게 행동하였다. 1335년 헝가리 비셰그라드에서 헝가리의 카로이 1세, 보헤미아 국왕과 회의를 열어 헝가리와 폴란드가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동맹을 수립했다. 크라쿠프에서 국제 정치 회의를 개최하여 보헤미아의 카렐 1세와 헝가리의 러요시 1세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기도 했다.

1364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건립하고, 폴란드 법전을 집대성하여 업적을 빛냈다. 그의 통치는 국왕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지 않는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카지미에시 3세는 후사 없이 1370년 사망하여, 외조카인 헝가리의 러요시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 1. 초기 생애

카지미에시 3세는 고공 시대의 폴란드를 통일해 피아스트 왕조의 중흥기를 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로,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1333년,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하자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다.

2. 2. 왕위 계승과 국내외적 위협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는 고공 시대의 폴란드를 통일해 피아스트 왕조의 중흥기를 열었으며,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1333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했을 때, 폴란드는 분열 상태에서 통일되었고 내부는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 독일 기사단, 보헤미아 등으로부터 외압을 받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튜턴 기사단과의 타협을 택하여 보헤미아의 실레시아 영유권을 인정하고, 대신 폴란드의 왕관을 포기하게 했다. 포메라니아의 독일 기사단에는 강경책을 썼다.[4] 카지미에시가 1333년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지위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칭호를 인정하지 않고 대신 그를 "크라쿠프의 왕"이라고 불렀다. 왕국은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지쳐 있었으며, 경제는 파탄 지경이었다. 1335년 트렌친 조약에서 카지미에시는 실레시아에 대한 그의 주장을 "영구적으로" 포기해야 했다.[5]

1335년, 보헤미아와 협상하여 거액의 지불과 교환으로 화해했다. 1343년에는 로마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하에 독일 기사단과 협상하여 쿠야비와 도브진을 획득하는 한편, 그단스크, 포모제를 할양하여 화해했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에게는 일시적으로 전쟁 상태로 치달았지만, 실레시아의 귀속 등 국경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화해를 이끌어냈다. 후에 손녀 엘리자베트가 카를 4세의 네 번째 왕비가 되었다.

1335년에는 헝가리 비셰그라드에서 헝가리의 카로이 1세 국왕, 보헤미아 국왕과 함께 2개월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헝가리와 폴란드가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보헤미아 왕 요한으로부터의 왕위 청구에 대해서는, 같은 해 요한 및 헝가리 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헝가리 영토 비셰그라드에서 회담하여,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요한에게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게 했다.

그 후 카지미에시 3세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할리치-볼히니아 전쟁을 일으켜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할리치 공국, 르부프를 1340년부터 1352년에 걸쳐 지배하에 두어 폴란드 왕국의 영토를 배증시켰다. 1366년에는 볼히니아, 포도리아도 병합했다. 우크라이나의 영유권에는 1352년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족과의 충돌을 물리치고 갈리치아볼히니아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카지에미시는 갈리시아에 그리스정교 수좌 대주교구를 설립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이러한 자유로운 통치는 새 영토가 종교적으로 상당히 이질적인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의 통치 하에 놓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카지미에시 3세(1370) 통치 말기의 폴란드(빨간색); 실레시아 (노란색)는 상실되었지만 왕국은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2. 3. 외교적 노력과 영토 확장

카지미에시 3세는 외교에 능숙함을 보였으며, 그의 왕국 영토를 두 배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서쪽과 북쪽의 잠재적 적대 세력과의 관계를 중립화했으며,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4] 그는 폴란드 역사에서 붉은 루테니아와 볼히니아로 알려진 할리치와 볼로디미르(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의 루테니아 왕국을 정복했다. 국경을 남동쪽으로 확장함으로써 폴란드 왕국은 수익성이 높은 흑해 무역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4]

1333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했을 때 폴란드는 분열 상태에서 통일되었고 내부는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 독일 기사단, 보헤미아 등으로부터 외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카지미에시 3세는 무력이 아닌 외교로 해결하려 했다. 1335년 보헤미아와 협상하여 거액의 지불과 교환으로 화해했다. 1343년 로마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하에 독일 기사단과 협상하여 쿠야비와 도브진을 획득하는 한편, 그단스크, 포모제를 할양하여 화해했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와는 일시적으로 전쟁 상태로 치달았지만, 실레시아 귀속 등 국경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화해를 이끌어냈다. 후에 손녀 엘리자베트가 카를 4세의 네 번째 왕비가 되었다.[5]

그 후 동방으로 진출하여 할리치-볼히니아 전쟁을 일으켜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할리치 공국, 르부프를 1340년부터 1352년에 걸쳐 지배하에 두어 폴란드 왕국의 영토를 배증시켰다. 1366년에는 볼히니아, 포도리아도 병합했다.[5]

1335년, 헝가리 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헝가리 영토 비셰그라드에서 회담하여, 보헤미아 왕 요한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게 했다.[6]

2. 4. 내치와 개혁

카지미에시 3세는 고공 시대의 폴란드를 통일한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로, 폴란드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그는 국가 정책면에서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 버금가는 천재성을 보여주었는데, 국제정치 문제에서 신중하고 능란하게 행동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 사후 폴란드는 다시 타협적인 독립 상태가 되었는데, 그는 보헤미아튜턴 기사단과의 타협을 택하여 보헤미아의 실레시아 영유권을 인정하고, 대신 폴란드의 왕관을 포기하게 했다.

내정에 있어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귀족의 권력이 강해 국왕의 권력이 약화되고 국내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법 제도를 정비하여 귀족의 권력 남용을 억제했다. 법학을 발전시키고 독일법을 널리 보급시켰으며, 정치적·경제적으로 약자인 농민을 보호하고 생활 개선에 힘썼다. 서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을 보호하고, 국외로부터의 이민을 장려하여 상업도 크게 발전했다.

1347년에는 폴란드 왕국의 기본법을 제정하고, 1364년에는 수도 크라쿠프에 폴란드 최초의 대학교인 야기엘론 대학교를 설립하여 천문학과 법학 연구를 장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카지미에시 3세 시대에 폴란드는 대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347년 3월 11일 비스리차에서 열린 세임에서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사법 시스템 개혁을 도입하고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대한 민법형법을 승인하여 "폴란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 1364년 교황 우르바노 5세의 허가를 받아 크라쿠프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현재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8] 이는 프라하의 카렐 대학교에 이어 중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대학교라는 점에서 드문 업적으로 여겨졌다.[5]

카지미에시는 "농민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귀족의 압도적인 우위를 종식시키기 위해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의 법전을 도입했다. 그의 치세 동안 귀족, 사제, 부르주아 계급 등 세 주요 계급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 카지미에시가 군주로서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는 법이 귀족과 성직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 약자의 편을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과의 인기는 재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류 사회 계층이 납부한 토지세로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에 국가 재건에 도움이 되었다.[5]

카지미에시 3세는 "목조의 폴란드에 나타나, 벽돌의 폴란드를 남기고 떠났다"라고 칭송받고 있다.

2. 5. 왕위 계승 문제와 죽음

카지미에시 3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70년 외조카인 헝가리의 러요시 1세를 계승자로 임명하고 사망하였다.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시대를 외국인 왕이 통치했지만, 외국이 협력한 것은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이다.

1355년, 부다에서 카지미에시 3세는 아들이 없을 경우 조카인 헝가리의 루이 1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1] 이는 카지미에시 3세의 부친이 보헤미아에 대항하기 위해 헝가리의 카롤 1세를 도왔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1] 그 대가로 카지미에시 3세는 헝가리의 우호적인 태도를 얻었고, 이는 적대적인 독일 기사단 및 보헤미아 왕국과의 분쟁에서 필요했다.[1] 당시 카지미에시 3세는 45세였으므로 아들을 낳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1]

하지만 카지미에시 3세는 적법한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1]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손자인 카지미에시 4세 폰 포메라니아 공작을 입양하려 했다.[1] 카지미에시 4세는 1351년, 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포메라니아 공작 부인에게서 태어났다.[1] 그러나 이 유언의 내용은 카지미에시 3세가 1370년에 사망한 직후 크라쿠프로 급히 이동하여 귀족들에게 미래의 특권을 약속하며 매수했던 헝가리의 루이 1세에 의해 무효화되었다.[1] 카지미에시 3세는 또한 사위인 루이 6세 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변경백이자 선제후를 잠재적 후계자로 고려했지만, 루이 6세의 아내이자 카지미에시 3세의 딸인 쿠니군데가 1357년에 후사 없이 사망했기에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1]

그리하여 헝가리의 루이 1세가 폴란드의 후계자가 되었다.[1] 루이는 1370년 카지미에시 3세의 사망과 함께 왕으로 선포되었지만, 카지미에시 3세의 누이이자 루이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가 1380년 사망할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대부분 행사했다.[1]

1370년, 카지미에시 3세는 사냥 중에 낙마하여 사망했다.[3] 카지미에시 3세에게는 아들이 없어, 후계자로는 조카이자 헝가리 국왕인 러요시 1세가 첫 번째 후보로 거론되었다.[3] 카지미에시 3세는 러요시의 후계를 인정하는 한편, 자신의 외손자인 스웁스크 공작 카지미에시에게 후일 특권적 지위를 남기려 했지만, 폴란드 왕국의 재통합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그의 사후에는 주교와 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왕위와 도브진 지방을 제외한 왕국의 전 영토가 러요시 1세에게 상속되었다.[3]

3. 결혼과 자녀

카지미에시 3세는 네 번 결혼했다.

1325년 4월 30일 또는 10월 16일에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와 유브나의 딸인 알도나 오브 리투아니아와 결혼했다.[15] Aldona Ona Gediminaitė|알도나 오나 게디미나이테lt는 세례명인 안나로도 알려져 있었다.[15]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엘주비에타 카지미에주브나(1326년경 - 1361): 1343년 포모제 지방의 스웁스크 공작 보구슬라프 5세와 결혼했다.[15]
  • 크네군다 (1334년 - 1357): 1349년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6세(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셋째 아들)와 결혼했다.[15]


알도나는 1339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 카지미에시는 2년 동안 홀아비로 지냈다.

1341년 9월 29일, 카지미에시는 헤센 방백 하인리히 2세의 딸 아델라이드와 재혼했지만, 새 아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결혼 후 바로 별거했다. 아델라이드는 1356년에 친정인 헤센으로 돌아갔다.[15]

아델라이드와의 결혼을 해소하고 싶어 했던 카지미에시 3세는 왕비가 있는 몸으로 보헤미아 출신의 애첩 크리스티나와 중혼했다. 크리스티나는 프라하의 거상 미클라슈 로키차니의 미망인이었으며, 그녀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크리스티나는 남편의 사망 다음 해에 프라하 궁정에 시녀로 들어갔다. 카지미에시는 그녀를 프라하에서 데려와, 티니에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원장을 설득하여 두 사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비밀 결혼이었지만, 곧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중혼 상태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남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헤센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카지미에시는 아델라이드의 편을 드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경고를 무시하고 크리스티나와의 동거를 계속했다. 이 결혼 생활은 1363년 또는 1364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이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365년경, 카지미에시 3세는 실롱스크 지방의 자간 공작 헨리크 5세의 딸 야드비가를 네 번째 아내로 맞아 세 딸을 두었다.

  • 안나 카지미에주브나 (1366년 - 1422년 6월 9일): 첼레 백작 빌렘과 초혼, 테크 공작 울리히와 재혼,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안나는 후에 폴란드 왕비가 되었다.[17]
  • 크네군다 (1367년 - 1370년)[17]
  • 야드비가 (1368년 - 1407년경): 1382년경에 결혼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사항은 불분명하다.[17]


이 결혼을 할 당시에는 아델라이드도, 그리고 아마 크리스티나도 생존해 있었기에, 이 야드비가와의 결혼 역시 중혼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야드비가가 낳은 세 딸들이 적자라고 할 수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했다. 안나와 크네군다는 1369년 12월 5일에 교황 우르바노 5세에 의해 적자로 인정받았다.[18] 막내딸 야드비가도 아버지의 사후인 1371년 10월 11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적자로 인정받았다.[18]

참조

[1] 서적 Fall of Poland; containing an analytical and a philosophical account of the causes which conspired in the ruin of that nation; together with a history of the country from its origin, in two volumes. https://archive.org/[...] Charles Scribner publishing company
[2] 문서 Saxton, 1851, p. 535
[3] 서적 The Jewish People: An Illustrated History https://books.google[...] A&C Black 2006-09-15
[4] 뉴스 Kazimierz III Wielki (1310–1370) https://dzieje.pl/po[...] 2020-03-28
[5] 서적 Poland: The First Thousand Years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6] 서적 Church, State and Dynasty in Renaissance Poland: The Career of Cardinal Fryderyk Jagiellon (1468-1503)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07
[7] 뉴스 Czy Kazimierz Wielki zasłużenie nosi przydomek "wielki"? Argumenty za https://kurierhistor[...] 2020-03-29
[8] 서적 International Education: An Encyclopedia of Contemporary Issues and System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
[9] 서적 Poland: The First Thousand Years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0] 뉴스 Władca, który zasłużył na swój przydomek. Dziś rocznica śmierci Kazimierza Wielkiego https://www.wprost.p[...] 2020-03-28
[11] 뉴스 Kunegunda, córka Kazimierza Wielkiego: nieszczęśliwa panna młoda https://histmag.org/[...] 2020-03-29
[1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13] 뉴스 In Poland, a Jewish Revival Thrives—Minus Jews The New York Times 2007-07-12
[14] 뉴스 Esterka: między legendą a prawdą historyczną https://histmag.org/[...] 2020-03-28
[15] 웹사이트 Casimir III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8-04-12
[16] 뉴스 Krystyna Rokiczana. Romans Kazimierza z piękną Czeszką zakończony bigamicznym małżeństwem https://historia.org[...] 2020-03-28
[17] 뉴스 Nieszczęśliwy małżonek. Kazimierz Wielki – bigamista do kwadratu https://historia.org[...] 2020-03-28
[18] 문서 "Pope Gregory XI: the Failure of Tradition"
[19] 문서 Document Nr 1340 (CODEX DIPLOMATICUS MAIORIS POLONIA) https://web.archive.[...] POZNANIAE. SUMPTIBUS BIBLIOTHECAE KORNICENSIS. TYPIS J. I. KRASZEWSKI (Dr. W. ŁEBIŃSKI). 1879
[20] 뉴스 PEŁNA OBSADA I TWÓRCY https://www.filmweb.[...] 2020-03-29
[21] 뉴스 SCHINDLER'S LIST SCRIPT https://www.raindanc[...] 2020-03-29
[22] 웹인용 Narodowy Bank Polski - Internet Information Service https://www.nbp.pl/h[...] 2022-09-17
[23] 문서 Casimir III king of Poland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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